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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_뒤적이다관객과 배우 2024. 10. 1. 23:03
뒤적이다/이재무 망각에 익숙해진 나이/뒤적이는 일이 자주 생긴다/책을 읽어가다가 지나온 페이지를 뒤적이고잃어버린 물건 때문에/거듭 동선을 뒤적이고/외출복이 마땅치 않아 옷장을 뒤적인다바람이 풀잎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햇살이 이파리를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달빛이 강물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지난 사랑을 몰래 뒤적이기도 한다/뒤적인다는 것은/내 안에 너를 깊이 새겼다는 것어제를 뒤적이는 일이 많은 자는/오늘 울고 있는 사람이다/새가 공중을 뒤적이며 날고 있다 (이재무 시집 《슬픔은 어깨로 운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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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 , !)">>관객과 배우 2024. 8. 16. 17:17
“이것을 시라고 하면 시가 화냅니다. 이것을 산문이라고 하면 산문이 화냅니다. 시는 이것보다 높이 올라가고, 산문은 이 글보다 낮게 퍼집니다. 이것은 마이너스 시, 마니너스 산문입니다. 이것을 미시미산未詩未散이라고 부를 순 없을까, 시산문 Poprose이라고 부를 순 없을까, 시에 미안하고 산문에 미안하니까. 이것들을 읊조리는 산문이라고, 중얼거리는 시라고 부를 순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나는 시로 쓸 수 있는 것과 산문으로 쓸 수 있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그 두 장르에 다 걸쳐지는 사이의 장르를 발명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글은 나를 관찰하면 할수록 불안이 깊어지는 사람이 쓴 글입니다. 구태와 고독이 의인화된 그 사람이 쓴 글입니다. 그 사람을 나라고 불러본 사람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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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의 힘/정호승관객과 배우 2024. 7. 22. 20:24
「짜장면의 힘」 정호승 짜장면은 힘이 있다아버지의 힘이다짜장면은 장딴지에 꿈틀대던 아버지의 젊은 핏줄이다핏줄의 힘이다 나는 짜장면을 먹을 때마다 젊어진다다시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짜장면을 먹고 길을 달린다아버지가 짜장면을 사주실 때마다 힘차게 더 빨리 달린다 그러나 오늘은 처음으로 짜장면의 힘에 대해 슬퍼해보였다아버지의 짜장면을 먹던 내가 오히려늙은 아버지가 되었다 밤하늘은 짜장면처럼 캄캄하다별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흩어진다서울에 사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짜장면을 먹다가손수건을 꺼내 밤하늘의 눈물을 닦아준다 짜장면은 힘이 세다짜장면을 먹으며 가난도 함께 나누면 가난이 아니다 죽기 전에 맛있는 짜장면을 한 그릇 먹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처럼나도 죽기 전에 짜장면을 먹고 당신을 기다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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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마음의 기차역관객과 배우 2024. 7. 9. 14:31
「마음의 기차역」_이병률 기차는 떠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바깥 한데에서 뒹구는 잎사귀들은 헤아릴 것을 찾고 힘이 큰 바람에 기차역의 철골이 진동한다 천사는 다녀가지 않는다 유독 떠나고 돌아오는 인간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 어느 먼 데서 가져온 조개껍데기를 탁자에 놓고 보며 재난을 막으려는 것처럼 삼십 촉 알전구 하나씩 가슴에 품고 사는 건 옆에 와 있는 천사를 기다려서다 천사는 떠나지 않는다 천사는 연고(緣故)가 없어서 대리인이 아니라서 천사는 가까이 있다 기차는 떠나지 않는다. 이별(離別)을 찾으러 돌아온다 기차역 형광등이 파르르 떨면서 신발 등에 떨어진 고추장 자국을 비춘다 마음에 지나간 기차 바퀴 자국과 옛 애인에게 겨눈 잘못은 지워지지 않는다 떠나고도 오래 남아 마음의 반찬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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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타 도요/약해지지 마관객과 배우 2024. 7. 2. 16:39
「약해지지 마」 있잖아, 불행하다고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많았지만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병실」 아흔 다섯나를 시작으로아흔넷, 여든아홉, 여든여섯여자 넷이 머무는 병실 서로의 가족이 찾아오는 날은노인들이 한 가득통로는 휠체어로정체 중 모두의 웃음소리를 등 뒤로나는아들 팔에 매달려창가에서맑은 하늘을 보네 「어머니1」 돌아가신 어머니만큼아흔둘 나이가 되어도어머니가 그리워 노인 요양병원으로어머니를 찾아뵐 때마다돌아오던 길의 괴롭던 마음 오래오래 딸을 배웅하던어머니구름이 몰려오던 하늘바람에 흔들이던 코스모스지금도 또렷한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