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율동공원에서' 못다한 이야기

갑자기여인 2009. 5. 20. 21:16

  

    며칠 전 갑자기 율동공원에 가고싶어 아침 일찌기 나간 적이 있습니다. 늘상 걷던 곳이라 별 느낌없이 한참을 걸었습니다. 조팝나무가 큰 울타리 이상으로 덮여있어, 한 달포 전에 비싼 값으로 꽃장식을 했던 것이 속이 상하였습니다. 지금 쯤 이용하면 값이 쌀텐데. 내 옆을 지나

뛰어가는 청년을 따라서 나도 뛰었습니다. 숨이 차올랐습니다. 숲 속 오른 편에 사람의 모습의 둘레 같은 나무 판데기 4개가 서 있었습니다. 무턱대고 그 나무판에 몸을 기대어 섰습니다. ' 이게 뭘까?', 아이들이 조각품에 손을 대면 '얘들아 그러면 안돼지' 할 내가 그 나무 조각판에 몸을 담고 한참이나 있었습니다.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눈 앞의 전경은 '율동공원에서'에서 보여드린 그림 같았습니다. 부족한 제가 몇자 쓰는 것 보다는,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장영희 교수의 '축 복'이란 영미시 산책 중에서

  

                고귀한 자연 (벤 존슨 작)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나무가 크게만 자라는 것과 다르다

                          참나무가 3백 년 동안이나 오래 서 있다가/ 결국 잎도 못 피우고 마른 통나무로 쓰러지기보다

                          하루만 피었다 지는/ 5월의 백합이 훨씬 더 아름답다.

                          비록 밤새 시들어 죽는다 해도/ 그것은 빛의 화초요, 꽃이었으니

                         작으면 작은 대로의 아름다움을 보고/ 삶을 짧게 나눠보면 완벽할 수 있는 것을.

 

      3백년을 살아도 그저 버릇처럼 무덤덤하게 사는 것보다는 하루를 살아도 빛을 발하며 강렬하게 사는 것이 낫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지리멸렬하게 오래 사는 것보다 영혼의 빛을 발하며 짧고 굵게 사는 게 더 아름답다고 말입니다.

      삶을 거대한 그림 퍼즐로 생각하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건 작은 조각들을 하나씩메워가는 일입니다. 무슨 그림이듯 붓 터 한번

     으로 대작을 그릴 수는 없지요. 하루에 조금씩, 작으면 작은 대로의 예쁜 그림을 그리는 일부터 시작해야겠지요. 오늘이라는 내 인생의   한    조각으로 예쁘게 칠하면 그 그림은 작지만 나름대로 완벽할 수 있으니까요.

     5월의 백합은 무척 향기롭고 아름답습니다. 헌데 덩치만 크면서 누가 뭐래도 꿋꿋이, 말라 비틀어져 쓰러질 때 까지 3백 년을 버티는      참 나  무의 인내와 끈기도 참 멋지지 않나요?

 

  본래의 시보다 더 아름답고 깊이있게, 우리 모두를 희망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만들어 주던 장영희 교수가 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