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시도다

박과 바가지_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갑자기여인 2018. 11. 11. 14:31

 

『그리운 것들은 뒤에 있다』

 김용택 산문집

 

<박과 바가지>

 

     "한여름 해가 지고 땅거미가 찾아들 무렵이면 마을은 어슴프레한 어둠에 휩싸이고 풀잎들은 이슬을 단다.

촉촉한 어둠이 초가지붕을 덮으면 지붕 위 박덩굴에선 박꽃이 하얗게 피어나고 박나비가 찾아온다. 초가지붕과 박꽃, 그리고 덩그렇고 하얀 박덩이는 지금은 농촌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무대에 장식된다. 첫서리가 내릴 무렵까지 박과 박꽃과 박덩굴은  초가지붕 위에서 농촌의 서정을 맘껏 자아낸다.

      첫서리가 내리고 박덩굴이 시들면 어머니는 낭자머리에 바늘을 꽂고 조심조심 초가지붕으로 올라가 박똥구멍에 바늘을 꽂아본다. 바늘이 쑥 들어가면 익지 않은 박이고 바늘이 받지 않으면 잘 익은 박이다.

      잘 익은 박은 타서 커다란 쇠죽솥에 넣고 푹푹 삶는다. 박이 다 익으면 속을 긁어내 커다란 양푼에 담아 된장만 넣고 비벼서 먹는다. 온 식구가 배가 부르도록 먹는 것이다. 없고 배고프던 시절 박속은 식구들에게 아주 좋은 한끼 식사였다. 박속은 매우 모드랍고 맛이 있었다. 약간 비릿한 맛이 나기는 했지만 양껏 먹어도 큰 탈이 없었다.

      박속을 다 긁어내 먹고 햇볕에 널어 말리면 그게 바가지가 되었다.  바가지는  한아름이 되는 것에서부터 장종지만한 것에 이르기까지 크기가 다양해서 집안 살림에 여러모로 쓰였다."

 

중략

 

     "해 저물면 초가지붕 위에 하얀 박꽃이 피아나고, 그 초가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고샅길로 물동이를 이고 오던 어머니와 누님들, 달이라도 뜨면 박꽃은 더욱 하얬다. 물동이 위에 엎어진 물바가지에도 달빛이 떨어져 반짝였다. 높은 달과 달빛, 하얀 박꽃과 둥근 박덩이들은

가난한 살림살이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된 자연의 풍경이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자연과 인간이 연출해낸 가장 아름다운 무대였는지도 모른다. 박꽃과 박덩이 그리고 깁고기운 쌀바가지, 물바가지가 사라지면서 우리들의 생활은 여유를 잃어버렸다. 깁고기운 바가지가 박살이 나서 사라져버린 뒤로 우리들은 우리들의 소박한 삶의 얼굴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