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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라 하우스>_김영하_좀 봐주시오수필은 시도다 2018. 12. 6. 22:36
김영하『랄랄라 하우스』
묘하고 유쾌한 생각의 집
좀 봐주시오/김영하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노교수께서 자동차를 운전하여 출근하려다가 그만 신호를 위반하여 젊은 경찰관에게 운전면허증 제시를 요구받게 되었다. 평소 풍부한 유머감각을 자랑하지만 동시에 씀씀이가 매우 알뜰하기도 그 양반,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막내아들뻘되는 경찰관에게 사정을 하였다. "요 앞 대학교 선생이오. 수업에 늦을까봐 그랬으니 좀 봐주시오." 곧잘 통하던 수법이 웬걸,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매연과 미세 먼지를 들어마시며 준법정신 고취와 질서의식 함양에 몸 바치던 이 사명감 대단한 젊은 경찰관은 입가에 슬쩍 비웃음을 흘리며 이렇 말했다. "교수님께선 학생들한테 그렇게 가르치십니까? 어서 면허증 주십시오."말을 뱉어놓고 보니 자기도 좀 너무했다 싶었는지 경찰관은 괜히 모자를 한 번 벗었다 다시 쓰면서 손만 쑥 내밀었다. 그래도 손에 얹히는 게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운전자 쪽을 살피니 노교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네. 그렇지만 학생들이 봐달라면 좀 봐주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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