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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숙_ <투명 유리 세상>한결문학회 2021. 1. 15. 21:15
홍승숙 지음 《마음의 동산 》에서
「투명 유리 세상 」
집안 구석구석 버릴 것이 너무 많다. 하긴 절기로나 인생으로나 버려야 할 계절이다. 그간 애써 모으고 챙기며 여기저기 쌓아놓은 물건들을 끄집어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옷장이나 서랍장, 찬장까지도 모두 유리문으로 속이 환하게 들여다보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욕심 덜 부리고 늘 신경 써서 단정하고 간결하게 정리하지 않았을까?
사람 머리나 마음도 마찬가지여서 남에게 속을 보이는 사람보다 내면을 전혀 알 길이 없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을까. 유리뚜껑처럼 투명하게 보일 수 있다면 불필요한 허욕 거짓과 위선 분노와 좌절 등의 부끄러운 모습 버리고 착하고 예쁜 마음 정돈된 생각으로 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교육을 많이 받고 인격수양이 잘 된 사람일수록 감정조절능력이 뛰어나 속내를 알기가 더 어려울 때가 많다.
욕심 버려야지, 마음 비워야지, 세월 따라 그렇게 흘러가면서도 어쩌다 광고 요란한 세일기간에 큰맘 먹고 백화점을 둘러본다. 마땅한 물건 고르기가 무척 어렵다. 특히 옷 고르기다. 이 나이에 무릎보이는 치마? 양옆 언밸런스의 블라우스? 허리 잘록한 원피스? 엉덩이 나오는 짧은 자켓? 통 좁은 바지? 가늘고 굽 높은 하이힐? 멋지고 새로운 것은 모두가 그림의 떡이다. 노후 경제 사정도 문제지만 거의 전부가 나에겐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최근 모든 생활용품의 진화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그 중에 주방기구의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된다. 많은 용기들이 속이 다 보이는 유리그릇 유리뚜껑들이다. 나는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냄비와 프라이팬, 냉장보관용 찬그릇 앞에 발이 멎었다. 속이 시원하게 보이는 유리뚜껑에 매혹되어 얼른 집어 들었다. 생각보다 비싸다.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나는 직접 보고 만지기 전에는 물건 고르기가 어려워 홈쇼핑이나 인터넷쇼핑을 잘 하지 않는다. 물건을 직접 확인한 후에야 마음 놓는데 이미 보고 알았으니 비슷한 것으로 주문하면 경제적일 것 같아 TV 홈쇼핑채널을 돌렸다.
낮이나 밤이나 가가호호 안방 깊숙이 찾아들어와 온갖 미소와 그럴듯하게 성급한 독촉으로 약한 사람 유혹하는 홈쇼핑! 무엇 하나 필요치 않은 것이 없는 것 같이 새삼 입맛이 당긴다. 찬장 깊숙이 줄줄이 딸려 나오는 옛날그릇들이 원망스럽다. 눈 딱 감고 유리뚜껑 냄비와 프라이팬을 주문했다. 강화유리 뚜껑은 속 안이 환히 보여 참 좋다. 그 후 본전을 뽑을 만큼 애용하는 물건이 되었다. 냄비 속 콩나물과 야채가 숨을 죽이는 모습, 생선조림 국물이 졸아 아슬아슬 타기 직전에 발견하는 스릴, 먹다 남은 김치가 배추인지 총각무인지도 환하게 보이는 투명용기덕분에 이젠 태울 일도 줄었고 열었다 닫았다 하는 수고도 없으니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이렇게 먹고 사는 음식이 조리되는 과정과 그릇 속에 들어있는 물건 내용은 다 들여다보며 변하는 모습까지 알 수 있지만 늘 함께 사는 남편 속내는 아직도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낳아 기른 자식도 마찬가지다. 하기야 사람 속 다 보이면 더 힘들고 곤란한 게 인간관계 아닐까? 수시로 변하는 사람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요즘은 CCTV설치로 생활반경이나 접촉하는 범위가 모두 노출되기 마련이다.
마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받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정화되고 정당해지고 있을까? 범죄색출에 증거용으로 많이 쓰일 뿐 건전한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최근엔 유리사용이 부쩍 많아지고 있다. 각종 용기제작에서 대형 건축에 이르기까지 건물 전체가 유리인 경우도 있다. 건물 안에서 밖을 보노라면 수시로 변하는 풍광이나 밖의 장면들이 영화를 보는 듯 흥미가 있어 전망 좋은 집이 인기다.
사람마다 투명 눈으로 서로를 볼 수 있다면 최대로 멋지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꾸게 될는지, 아니면 지저분한 속내가 보여서 더 고통스러울는지. 투명인간 투명세상을 상상해 보며 혼자 웃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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