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이끼 조각/이원화

갑자기여인 2012. 1. 12. 21:16

     이끼 조각/이원화

 

                                                                                                                                          

철이 바뀌고 있다.

"오늘 점심 무얼 먹을까, 죽 먹으로 갈까?"

"그래요, 죽 먹으러 가요"

부부는 집을 나서자마자 충돌하였다. 남편은 팥죽 먹을 것을 생각하였는데, 아내는 닭죽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아내가 우겨서 닭죽 집으로 갔다. 그곳엔 벌써 사람들이 많이 와있어서 한참동안 기다렸다.

날씨 탓일까 그날따라 닭죽의 양이 왜 그렇게 많은 지 팥죽집으로 양보할 것을 후회하면서 일어났다.

통나무집에서 차를 마시는데 봄바람이 언덕을 타고 내려온다.

그곳을 따라 뒷동네로 올라가니 넓은 호수가 낚시터로 자리 잡고 있다.

오랜만에 가벼운 발걸음에 콧노래로 박자를 맞추며 걷고 있는데, 호수 너머로 움퍽 꺼진 언덕이 눈에 띄었다.

지난겨울 찬바람과 눈비로 산허리는 허물어지고 바닥은 진흙더미로 진창이 되어 가까이 갈 수가 없었으나

그 속에서 빛을 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아마도 먼 소인국에서 날아온 작은 보석들이 별, 산호, 죽순 모양으로 서로를 뽐내고 있다.

그것들은 마르고 엉클어진 아카시아 나무뿌리 사이에서 화사하게 봄 잔치를 준비하고 있다.

그 언덕 위에는 향기를 내뿜는 생강나무가 그늘이 되어주고 있다.

봄맞이 잔치를 한창 열고 있는 초록과 파란색을 띈 고것들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물기와 흙덩이로 뭉쳐진 이끼 조각을 한 손 가득히 떼어냈다. 어디에 담을까 망설임도 없이 손수건에 싸서,

도둑질하는 것처럼 주변을 휙 둘러보고 재빨리 핸드백 속에 넣었다.

큰 횡재를 한 듯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넓은 접시 모양의 백자 화기에 이끼 조각을 앉혔다.

그 낟알 같이 작은 것들이 맑고 청아해서 잡고 있는 손에서 온몸까지 전율을 느끼게 했다.

마치 성당입구에 있는 성수를 온 몸에 뒤집어 쓴 것처럼 성스럽기까지 하였다.

한 옥타브 올린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여보, 이 거 봐요"

하는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엄지손톱 크기의 새까만 벌레가 그 속에서 기어 나오고 있다.

또 한 마리가 뒤따라 나오고 있다.

열쇄로 잠가 놓은 명품상자의 값비싼 보석보다 더 아름답고 더 빛나는 생명력을 가진 이끼로 창조주의 오묘함을 느끼는데,

산 벌레의 출현으로 또 다른 전율을 받았다.

습기가 많은 땅이나 숲속 산 바위틈에서 맑은 공기, 습기, 햇빛을 받으며 살고 있는 이끼들,

아무렇지도 않게 작은 그것들에게도 욕심의 문을 쉽게 여는 가볍고 어리석은 자신을 보았다

"언제 철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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