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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가

산책하는 길섶에 코스모스가 꽃을 피우고 있네요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들여다 보니 그 안에 지난 주에 만났던 친구들의 얼굴이 보입니다 첫번째, 두번째...그 친구가 있네요 그날 보랏빛으로 한껏 모양을 낸 K 이 나이에도 챗GPT 강의를 듣고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는 리더 살림이라고 전혀 안 할 듯한 진정한 살림꾼 P 늘 울보 먹음고 나약해 보이는 이 우리는 동아리를 잠시 잊었지만 그래도 '나는 인생의 작가'라고 큰소리치고 있지요 우리는 퇴임퇴직해서 만난 친구들, 10여년을 훌쩍 넘긴 세월을 쌓고쌓아서 번개치며 무섭게 쏟아지는 소나기조차 함께 맞으며 즐겁게 우산을 펼칩니다 수많은 사고와 재난이 계속 이어졌던 지나가는 여름, 아침 저녁 일교차가 심하네요 "오랫동안 알고 지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그들의 이름..

한결문학회 2023.08.27

채인숙/오래된 아침 외 2편

초록이 아닌 것은 어떤 집의 배경도 되지 않는 섬 나라로 왔습니다 가져 온 여름 옷 몇 벌을 벽에 걸어 놓고 걷는 사람보다 서 있는 나무가 더 많은 길을 뒤꿈치를 들고 천천히 걷습니다 해가 뜨기 전 기도를 끝내고 다시 날이 저물기 전에는 윗옷을 걸치지 않는 남자들이 집 앞에 몰려 체스를 둡니다 눈이 내리는 풍경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여자들은 푸른 히잡을을 쓴 채 나무 아래 좌판을 펼칩니다 밤새 우린 약초 물을 바구니 가득 세워놓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칩니다 동네 공동묘지에는 새벽에 둔 꽃다발이 벌써 시들 준비를 하는데 사람들의 미소는 종일 싱그럽습니다 지천으로 떨어진 열대 꽃을 주워 식탁 위에 올려놓으면 오랜 이름들이 하나둘씩 잊혀갑니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은 견디지 않아도 된다고 떠나온 나라는 아..

관객과 배우 2023.08.20

이근화 /세상의 중심에 서서

「세상의 중심에 서서 」 이근화 도서관을 세웠습니다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책을 날마다 주워 와서 번호를 매기고 뜯긴 책장을 붙였습니다 나란히 꽂았습니다 캄캄하고 냄새가 나서 나는 이곳이 좋아요 조금 더럽고 안락해서 날마다 다른 꿈을 꿉니다 도서관이에요 책들은 하룻밤이 지나면 숨을 쉬고 이틀 밤이 지나면 입술이 생기고 사흘째 팔다리가 태어납니다 나흘째 사랑을 나누고 먼지가 가라앉습니다 나는 뻘뻘 땀을 흘리며 혼자 길고 긴 산책을 합니다 멀리서 책을 한권 또 주워왔습니다 이번에는 코가 없고 감기에 걸린 놈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함께 커피를 마시고 토론을 했습니다 불을 다 끈 도서관에서 우리는 우리는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 서서 구멍 난 내일을 헌신짝 같은 어제를 조용히 끌어안았습니다 도서관이었기 때문입..

관객과 배우 2023.08.16

인생은 길다/문효치

윤재천 엮음 김 종 그림 《그림 속 아포리즘 수필 》 「인생은 길다」 문효치 흔히 세월은 빠르고 인생은 짧다고 말한다. 나도 가끔 그렇게 말하곤 한다. 우리 속담에 '세월은 문틈으로 보는 말처럼 달린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말은 세월이 너무 빨라서 인생이 짧음을 뜻한다.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느니 '인생여초로(人生如草露)'니 '소년역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등의 말도 있다.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의 이 시조 뒤에서 들려오는 그 한탄이 가련할 지경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인생은 충분히 길다.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는 그 분의 시할머니(나에겐 고조할머니)에게서 들은 말을 여러 번 되뇌곤..

관객과 배우 2023.08.10

... 이 사진을 보며...

날마다 같은 여건에 묶여서 같은 관계로 있을 때 환기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깝든 멀든 여행을 떠나는 것 같습니다. 여행을 하지 못하는 요즘은 지난 여행 사진을 보며 그 공간에 멈춰 서서 새로운 여행을 계획하고 떠나려 합니다 (......) "이런 큰 꽃은 어디서 왔을까, 창조주의 정원에서 온 것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당신의 꿈, 당신의 힘이 아니라면 이런 꽃을 빚어낼 수 없을 것이다. 아프리칸 튤립나무는 1년에 2m씩 자라서 결국 20m 이상 수직으로 성장한다. 나뭇잎은 동백섬 잎처럼 은빛으로 반짝인다. 유황물을 먹어서 일까, 맑게 비치는 햇살 속에서 나뭇잎과 꽃송이는 길을 내고, 그 길 따라 말타고 가는 손자는 숲속의 왕자였다. 뒤 따라 가며 떨어진 꽃을 줍고 또 줍고 평화가 가득..

가족이야기 2023.08.03

사람의 됨됨이/박경리

가난하다고 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 부자라고 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 후함으로 하여 삶이 풍성해지고 인색함으로 하여 삶이 궁색해 보이기도 하는데 생명들은 어쨌거나 서로 나누며 소통하게 돼 있다 그렇게 아니하는 존재는 길가에 굴러 있는 한낱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인색함으로 하여 메마르고 보잘것없는 인생을 더러 보아 왔다 심성이 후하여 넉넉하고 생기에 찬 인생도 더러 보아 왔다 인색함은 검약이 아니다 후함은 낭비가 아니다 인색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낭비하지만 후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준열하게 검약한다 사람 됨됨이에 따라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 후한 사람은 늘 성취감을 맛보지만 인색한 사람은 먹어도 늘 배가 고프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다

관객과 배우 2023.08.01